1011년 2차 고려거란전쟁이 끝난 후 김훈과 최질 등의 무신들의 반란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무신과 문신들이 서로 불신하는 계기가 되었고 후대의 무신 정변 및 무신 정권 탄생 시초가 되었습니다.
고려시대 문신과 무신의 대우는 달랐습니다. 문신은 정1품까지 오를 수 있었지만, 무신은 정3품의 상장군 직위가 최고의 품계였습니다. 군대의 총 지위관도 무신이 아닌 문신이 담당했습니다. 실제로 거란의 1차 침입 때 중군사로 군을 이끌었던 서희,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의 주요 인물인 귀주대첩에서 지휘를 담당했던 감강찬도 문신 출신입니다. 녹봉도 차별성이 존재했습니다.
결국 무신들은 이러한 차별들에 대하여 분노하게 됩니다.
최질 김훈의 난
고려 8대 국왕인 현종 재위기에 김훈, 최질 등의 무신들이 일으킨 반란 사건입니다. 1014년 11월부터 1015년 3월까지 약 4개월 간 지속되었습니다. 제2차 거란의 침입 이후 국토가 황폐해지고, 거란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서 군사력을 키우는 과정 중, 국가에서 관료들에게 지급해야할 전시과에서 문제가 생기면서 예상치 못한 사태가 발생하게 됩니다.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에서도 알 수 있듯이, 김훈과 최질은 제2차고려거란전쟁 때 공을 세워 상장군에 오른 고위 무관들입니다. 김훈은 강조의 통주 전투에서의 대패 이후 진격하던 거란군을 상대로 완항령에서 같은 좌우기군 장군인 김계부, 이원, 신녕한과 더불어 기습공격을 하여 거란군을 잠시 퇴각시킨 바 있는 인물이었고, 최질은 통주에서 중랑장으로 있던 중 포로가 되었다가 통주에 항복을 권유하러 온 행영도통판관 노전(강조가 죽을 때 거란에 항복했다가 다시 고려에 투항한 인물)과 그와 함께 온 합문사 마수를 홍숙과 함께 억류한 뒤 항전을 주장하여 통주를 굳건히 지킨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최질은 전쟁 중 공을 세웠음에도 문관직을 얻지 못해서 불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와중에 장연우와 황보유의가 무신들의 영업전을 뺏어서 문신들의 녹봉을 충당하려 하였고 이런 비정상적인 조치는 최질과 김훈이 주도하는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계기가 됩니다. 결국 이들은 현종에게 위협이 담긴 호소로 자신들의 월급을 모두 빼앗아간 문신들을 귀양 보내고 일종의 무신정권을 세웠습니다.
또한 무신들은 영업전의 반환은 물론 6품 이상의 모든 무관들에게 문관직을 겸하도록 현종에게 요구했으며 현종은 이들의 협박에 무신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게 됩니다. 김훈과 최질은 무관이 문관을 겸하게 만드는 한편 어사대와 삼사를 각각 금오대와 도정서로 바꿔버리면서 권력까지 모두 장악합니다.
무신들 난의 원인을 제공한 장연우와 황보유의
2차 고려거란전쟁이 발발하자 전시에 돌입해 군비가 증액되었고 관리들은 녹봉을 제때에 받지 못했습니다. 중추원 일직원인 황보유의와 중추원사 장연우는 경군의 영업전에서 백관의 녹봉을 충당할 것을 현종에게 제안했고, 이 제안이 받아들여져 급한 불은 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업전을 빼앗긴 무관들은 불만을 품게 되었으니, 김훈과 최질 등은 현종 5년(1014년) 11월 군사를 동원해 반란(김훈·최질의 난)을 일으키고는 궁궐에 난입합니다. 결박된 채 채찍으로 맞아 초주검이 된 황보유와 장연우는 먼 곳으로 유배되었습니다.
장연우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에서 전쟁 중 군복을 입고 전쟁터에 나갔지만 무신이 아니라 문신입니다.
장연우는 객성을 지낸 장유의 아들입니다. 장연우는 광종 때 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경종·성종·목종·현종의 네 임금을 섬겼습니다. 장연우는 행정 실무에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고 합니다. 병부시랑을 지냈고 2차 고려거란전쟁때 강조를 따라 통주에서 행영도부사로 참전합니다. 장연우는 2차 고려거란전쟁 중 현종의 몽진 때 지채문과 함께 현종의 곁을 끝까지 지킨 인물입니다.
김훈-최철의 난이 발생하여 유배를 가기 되었고 난이 진압되자 복직되었고 1015년 6월 호부상서가 되고 11월 23일 사망한 뒤에는 상서우복야로 추증됩니다.
황보유의
황보유의는 공신의 후손으로 그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고려에 훈공을 세웠습니다. 황보유의는 목종 시절 왕의 측근으로써 목종을 보좌하고 그의 편이었습니다. 목종 12년(1009년) 목종은 황보유의에게 훗날 현종이 될 대량원군을 삭각산 신혈사에서 못 오도록 명을 내립니다. 1009년 황보유가 대량원군을 개경으로 모시고 왔을 때는 이미 강조의 일당이 목종과 천추태후를 법왕사로 쫒아낸 뒤였습니다. 목종은 폐위되었고 현종이 옹립되었으며 현종 원년(1010년) 11월 판관(判官)으로서 통주 전투에 참가했지만, 강조가 패배하여 별다른 활약을 펼치지 못합니다. 현종 2년(1011년) 전중시어사를 거쳐 이부낭중에 임명되었고, 이후 내사사인, 중추원 일직원으로 관직이 바뀌었다.
김훈-최철의 난이 발생하여 유배를 가기 되었고 난이 진압되자 현종 7년(1016년) 급사중으로 복귀했습니다. 현종 17년(1026년) 어사대부에 임명되었고, 현종 20년(1029년) 수도 개경에 나성을 쌓았습니다. 제9대 덕종 원년(1032년) 참지정사에 임명되었고 이부상서를 겸했습니다. 제10대 정종 원년(1034년)과 2년(1035년)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정종 3년(1036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를 역임하고, 관직에서 은퇴한 황보유의는 정종 8년(1042년)에 죽었습니다.
최질 김훈의 난의 결말
최질 김훈의 난은 화주방어사였던 이자림이 올린 계책에 따라 1015년 3월 무신들을 모두 서경의 장락궁에 초청해 연회를 베푼 사이 반란 주동자인 김훈, 최질 등 술에 취한 장군 19명을 모두 죽이고 나머지는 항복하면서 끝나게 됩니다.
이후 현종은 주살한 19 이외에 가족들은 한명도 처형하지 않았고, 아들과 동복형제들은 고향으로 돌려보내 등용문을 막는 정도로 마무리했습니다.무관에 대한 예우도 개선하여 전몰자에 대한 예우를 높여주고, 거란과의 전쟁 중 전사자에 대한 보상도 늘렸으며 군공자는 병사들까지 10,000여 명씩 포상을 주었습니다.
현종의 재위 기간 중에 일어난 최대의 실책으로 볼 수 있는 사건이었지만 현종은 나름 뒷수습은 잘하였던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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